2년 만에 온 환자가 10분 만에 일어선 이유

상담이 시작되고 10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. 엑스레이를 띄워놓고 설명을 이어가는데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.
“아, 저 안 할래요. 그냥 갈게요.” 검진비만 결제하고 나갔고, 그 뒤로 오지 않았습니다.

준비가 부족했던 건 아닙니다. 2년 만에 온 구신환이었고 “왼쪽 위 충치 때문에 구멍이 난 것 같다”는 C.C도 분명했거든요. 파노라마와 치근단, 교익까지 다 찍었고 원장님 진단도 뒤에서 들었습니다.

상담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. “환자분, 전체적으로 충치가 많으세요.”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. 그런데 그 문장 다음부터 환자 표정이 굳었습니다.

비용 때문이었을까요?

환자가 나가고 나면 보통 셋 중 하나를 떠올립니다. 내가 뭘 잘못 말했나, 저분이 좀 예민하시네, 인레이 비용이 부담되셨구나. 세 번째가 제일 편하죠. 비용은 상담자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고, 다음 환자 차트를 열면 찝찝함도 금방 지나갑니다.

그런데 차트에 남은 상담 메모를 보면 이렇습니다.

  1. 충치가 많다고 하자마자 “왼쪽 위 구멍만 때우고 싶다”고 함
  2. 포토를 보여주며 충치가 깊어 인레이가 필요하다고 설명
  3. 환자가 세 번 말을 끊으며 구멍만 때우겠다고 반복
  4. 인레이 비용을 듣자마자 안 하겠다며 나감

4번만 보면 비용이 맞습니다. 그런데 3번을 보세요. 환자는 비용을 듣기 전에 이미 세 번 거절했습니다. 비용은 마지막에 나온 말이었을 뿐이에요.

2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

과거 차트를 열어봤습니다. 이 환자는 2년 전에도 같은 C.C로 이 치과에 왔었더군요. 그때와 오늘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.

같은 부위, 같은 방식, 같은 결과. 상담자만 달랐습니다. 이 상담은 처음 실패한 게 아니었어요. 2년 전에 한 번 실패한 방식을 그대로 반복한 겁니다. 환자 입장에서는 그때 납득이 안 됐던 이야기를 똑같이 다시 들은 셈이죠.

“구멍만 때우고 싶다”를 세 번 말한 것도 달리 읽힙니다. 재료 얘기가 아니었어요. 2년 전에도 여기서 같은 말을 듣고 안 했다는 뜻입니다.

설명은 다 했는데 상담은 못 했습니다

엑스레이를 띄워놓고 지금 상태를 하나씩 말하는 건 설명입니다. 상담은 환자가 “그럼 하겠다”고 해야 끝나고요. 그날 상담자는 설명을 끝냈지만 상담은 시작도 못 했습니다.

초보 상담자분들이 이런 고민을 자주 합니다. “환자가 더 많이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데, 막상 해보면 제가 훨씬 많이 말해요.” “좋은 질문을 하라는데 뭘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.” 질문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. 물어볼 게 없어서입니다.

오늘 찍은 엑스레이만 보고 있으면 치아 상태 설명은 나와도 그 사람한테 물어볼 말은 안 나오거든요. 과거 기록을 먼저 읽으면 달라집니다. 2년 전에 권유받은 치료를 왜 안 하셨는지, 그사이 불편하진 않으셨는지, 다른 데서 받으셨는지. 물어볼 게 줄줄이 생깁니다.

이름을 부르기 전 3분

구신환 차트가 접수되면 환자 이름을 부르기 전에 3분만 과거 기록을 봅니다. 확인할 건 셋이면 충분해요. 지난번에 왜 왔는지, 그때 원장님이 뭐라고 했는지, 왜 치료를 안 받고 갔는지.

3분이 아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. 그런데 위 사례에서 촬영하고 상담한 시간은 30분이 넘어요. 그 30분을 날리지 않으려고 앞에서 3분을 쓰는 겁니다.

그럼 뭐라고 시작했어야 할까요?

진단은 그대로입니다. 인레이가 필요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. 달라지는 건 말하는 순서입니다. 아래는 외우는 대본이 아니라 순서만 참고하시면 됩니다.

먼저 질문으로 엽니다. 진단은 잠깐 미뤄두고요. “차트를 보니 2년 전에 한 번 오셨네요. 그때 왼쪽 위 재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있었는데, 혹시 다른 치과에서라도 받으셨을까요?” 담고 있는 내용은 “전체적으로 충치가 많으세요”와 같습니다. 다른 건 돌아오는 말이에요. 앞 문장에는 “아닌데요”가 돌아오고, 뒤 문장에는 “아, 그때…”가 돌아옵니다.

왜 미뤘는지 듣고 나면 받아주는 말이 먼저 나갑니다. “안 아프셨다니 다행이에요. 당장 안 아프면 치과 오기 진짜 쉽지 않잖아요. 말씀하신 대로 간단히 때우고 끝나면 저도 좋겠는데, 지금은 그게 어렵습니다.” “안 됩니다”가 아니라 “저도 그러면 좋겠는데 지금은 어렵다”로 여는 거죠. 환자가 원하는 걸 부정하지 않고 시작하는 겁니다.

그다음이 싱크홀입니다. 겉보기엔 작은 구멍인데 그 밑으로 흙이 다 쓸려 내려가 큰 동굴이 생겨 있다는 그 뉴스요. 지금 치아가 딱 그 상태라고 말합니다. ‘인레이’라는 말은 아직 안 나와요. 환자 머릿속에 싱크홀부터 넣어야 그다음 설명이 붙거든요.

여기서 사진을 띄웁니다. 오늘 사진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을요.

“이게 2년 전 사진이고, 이게 오늘 사진이에요. 그때는 환자분 말씀대로 간단히 때울 수 있는 상태였는데, 지금은 겉에 단단한 껍질 안쪽으로 충치가 퍼져서 푹 주저앉아버렸어요.” 오늘 사진만 있으면 환자는 ‘치과에서 크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’ 하고 생각합니다. 2년 전 사진이 옆에 있으면 다르죠. 그 2년은 환자 본인이 미룬 시간이니까요.

치료 이름은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. 겉에만 때우면 얼마 못 가 재료가 깨지거나 치아가 더 크게 깨진다, 그러면 아래쪽 금니 씌우신 것처럼 훨씬 큰 치료로 넘어간다, 그래서 퍼즐 조각 끼우듯 채워 넣는 인레이가 필요하다. ‘인레이’가 나온 건 여기가 처음입니다. 실패한 상담에서는 두 번째 문장이었고요.

순서를 바꾸면

이 환자는 ‘안 아프니까 심각하지 않다’고 생각한 분입니다. 그런 분에게 치아 상태와 비용부터 꺼내면 2년 전과 똑같아져요. 환자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기는커녕 불쾌감만 안고 돌아갑니다.

그래서 “구멍만 때우고 싶다”는 말에 “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”고 먼저 받아주는 게 핵심입니다. 그다음에 왜 지금은 그 치료가 어려운지, 무리하면 어떻게 되는지, 2년 전과 뭐가 달라졌는지를 눈으로 보여주는 거죠. 상담은 말솜씨가 아니라 순서 문제예요.

기록이 없다면

과거 기록이 부실해서 볼 게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. 그건 상담자 잘못이 아니에요. 병원이 무엇을 남길지 정해두지 않아서죠. 정해진 게 없으면 사람마다 다르게 적고, 결국 아무도 못 씁니다.

그래서 이번 상담의 마지막 일은 다음 상담자가 쓸 수 있는 메모를 남기는 것입니다. 환자가 거절한 이유와 그때 쓴 표현 그대로요. 상담에 정답은 없지만 환자를 이해하려는 관심은 배신하지 않습니다. 그리고 그 관심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, 환자가 우리 치과에 남긴 기록에서 시작됩니다.

위즈벤은 파트너 치과와 함께 상담 기록 규칙과 상담 순서를 정리하고, 상담자가 매번 감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실전 코칭을 진행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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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 병원 차트에 다음 상담자가 쓸 수 있는 기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, 자가진단으로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. 원장님과 함께 보시면 더 좋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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